ARTIST STATEMENT

       What torments me is loneliness. I believe the source of loneliness is not a feeling of solitude but an intrinsic fear of death, which we must carry until the day that we die. Because of this I constantly strive to accept death without fear.
       I hypnotize myself in order to escape the pain by ridding death’s obsession from my body. I visualize the universe as one organism and human beings as cell groups that are constituents of that organism. As I consider all the parts of my body as myself, all the things in the universe become myself if I become a constituent material in the organic being that is the univers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becomes a part of my being, linked by invisible lines as I expand my recognition. When we look at the visible, everything in this world seems to have a distinct individual existence. However, existentially, all living and non-living things exist as a single organic being; perpetually connected through cause and effect.
       ​My artwork expresses these interconnected relationships. Glass panes of different colors and designs appear physically distinct; however each piece is invisibly and internally linked through its underlying ceramic elements. These common organic forms represent our shared existence through time and space.

 

 


 

작가노트

하나의 현상은 독립적으로 발현되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들에 의해 파생되고 또 다른 현상을 일으키는 근원이 된다. 삶 역시 현상의 일부이다. 하나의 삶은 수많은 삶과 관련되어 있고 시작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이 가위로 잘리 듯 분리되어 구분되지 않는다. 탄생은 단순히 무에서 유가 된 것이 아니고 죽음 또한 존재했던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얽혀있고 만물은 하나의 큰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존재한다. 

생명체같이 촉촉하고 유연했던 흙을 가마에 구워내면, 생명의 시간이 멈춘 듯 단단하게 굳어 움직임의 모습만이 남아 있게 된다.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을 거친 재료들이 불과 만나 작용하며 흐르던 유약도 흐르는 것을 멈춘다. 생명의 움직임을 간직한 도자의 모습은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순환 속에서 삶의 한 찰나를 보여주며 생명을 대변하고 때로는 생명을 부여한다. 

가시적으로 봤을 때 만물은 개별적 존재 같지만 비 가시적인 영역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존재이다. 작업을 통해 이런 비 가시적인 영역을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다양한 색과 텍스쳐로 형상화된 세상 만물은 서로 얽혀 있기도 하고 같은 내면의 모습을 공유하여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큰 순환의 움직임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로서 존재한다.

 


 

 

 

삶과 죽음이 연결된 유동적 구조 



이선영(미술평론가)

김하경의 작품에는 자신의 것임을 표시하는 특별한 표지가 달려있다. 마치 작가의 싸인처럼 서로 다른 시기의 작품들에도 어김없이 같은 유형이 자리한다. 어디서나 보이는 오돌도돌한 돌기모양의 군체가 그것인데, 이것들은 여태까지 해왔던 많은 작품들이 겉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하나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간에 행해왔던 유약의 실험이 다양한 표면효과를 가져왔다면, 돌기들은 그러한 변수를 초월하는 상수가 되는 셈이다. 그것은 유기체를 이루는 기본단위인 세포처럼 보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유기체를 초월하여 격세유전적으로 작동하는 유전자같은 면모를 가진다. 그것은 어디에나 편재하기 때문이다. 군체의 규모는 작품마다 다르다. 그것들은 약간의 색상 차이는 있지만, 새장부터 유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물 안팎에 자리하며, 일상공간의 틈 여기저기에도 머리를 드리밀고 있다. 마치 작가가 관심을 가지는 자연생태계와도 같이 그것이 자리 잡지 못할 곳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표면으로부터 자라난 듯이 보인다. 이 돌기들은 융모세포를 닮았는데, 그런 모양의 세포는 태반이나 장 내부에서 대표적이다. 물론 이 추상적인 형태는 동물성 뿐 아니라 과육같이 식물성의 면모를 가지기도 한다. 융모세포는 작은 체표면적을 최대화하기 위해 진화된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는 개체의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수분이나 양분을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에는 먹고 먹히는 관계로 특징지을 수 있는 생태계를 참조한 작품들이 많다. 거기에는 배고픔과 그 충족이라는 내장의 감각이 있다. 그것은 한 개체의 생명력이 유지되기 위해 다른 개체의 생명력이 박탈되는 가혹한 게임이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사슬은 삶과 죽음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려주며, 이러한 보편적 상황은 비극도 희극도 아닌 자연의 법칙임을 깨닫게 한다. 융모, 또는 융털 모양의 구조를 흉내 낸 일상의 물건으로는 수건이 있다. 그 형태자체가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을 자아내며, 자연스럽게 유기적 형태를 떠오르게 한다. 

 
김하경의 작품에서 융모의 색은 아이보리나 살구 빛나는 아이보리, 또는 노랑 기운이 있는 하얀색 등, 체온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 같은 느낌이다. 단면의 형태도 제시된 작품에도 그 안쪽에 이 구조가 빼곡히 들어차 있곤 한다. 단면은 역설적으로 융모의 연속성이나 운동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조의 단면, 움직임의 단면인 것이다. 매끈한 실루엣의 주머니에 촘촘한 융모가 들어차 있는 듯이 보이는 작품 [먹히는 것들]은 융모를 가득 품은 채 웅크리고 있지만, 어떤 자극에 직면하면 확 뒤집어 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뫼비우스 띠처럼 안과 밖의 구별이 결정적이지 않다. 내부에 가득한 주름은 접고 펼치는 기능을 발휘하여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처한다. 질 들뢰즈의 [주름]이 암시하듯이, 주름의 접고 펼치기는 생명이 발생하는 단계부터 일어나는 일이다. 발생학은 두 개의 이질적인 세포가 만나 수정이 되면, 이후 수많은 세포분열을 통해 개체로 성장함을 보여준다. 

 
하나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비슷하게 생긴 형태의 군집은 잠재적인 동감을 자아낸다. 돌기들이 그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 외에 움직임이 더 필요하다. 그것은 유동적인 구조인 것이다. 여러 개의 단위구조들은 서로의 몸을 치대며 움직이는 순간이 구조화 된다. 진흙이라는 말랑말랑한 소재로 형태를 만든 후 유약을 바르고 굽는 행위는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세라믹으로 완성된 형태에도 최초의 부드러움의 느낌을 남겨놓은 것이다. 작가는 ‘뜨거운 가마 안에서 도자로 굳어지는 흙은 마치 죽음의 시계를 멈추기 위해 액화질소 속에 들어간 냉동인간 같다’고 말한다. 흙은 촉촉하고 움직이는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가마에 들어가면 생명의 시간을 멈추고 경직된다는 상상이다. 구워서 단단하게 만들기는 도예의 기본적인 과정에 대한 남다른 상상력은 부드럽고 따스한 유기체의 감각을 남겨둬야 한다는 형식적 선택을 낳았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서로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형태의 작품 [먹고 먹히는 것들]은 제목만 아니라면, 적대적—잡아먹히는 입장에서 보자면--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찰 진 결합력을 가진다. 아크릴 판이 프레임에 사이에 올려져 있는 작품 [Links in a chain]은 몇 개의 층위가 한데 작용한다. 그것은 다른 색들이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둥그스름한 실루엣을 만든다. 김하경의 작품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 사이에서도 연결망을 이룬다. 돌기 모양 자체가 자족적이기 보다는 관계적인 구조인 것이다. [Links in a chain]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도예와는 다소간 이질적인 재료들이 조합되어 있는 작품들 또한 관계성을 강조한다. 세상의 여러 관계 중 가장 긴밀한 것은 나와 타자의 관계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심오한 관계를 낳는다. 자신의 경계를 풀어헤치는 것은 확장이자 죽음이다. 작가는 ‘나를 괴롭히는 고통은 육체적 자아의 유한함에서 오는 두려움’이라고 하면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주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전체로 이어져 있는 세계에서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화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려는 생각은 윤회를 믿는 불교에서 전형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윤회 사상에 내재된 계층적 사고는 경계하면서 생명의 순환에 초점을 맞춘다. 이번 전시에서 [먹고 먹히는 것들], [먹히는 것들]이라는 작품 제목은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다. 작품 [먹히는 것들]은 뱀이 염소를 먹는 형태이며, [먹히는 것들]은 먹이사슬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이 동물을 먹는 모습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두 개의 삶이 하나처럼 얽혀 있다. 먹히는 자 또한 먹는 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적대적이기 보다는 공생의 관계이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에서 경쟁보다는 공생을 강조한다. 그는 생물학자 마굴리스의 공생기원설(symbiogenesis)을 소개하면서, 항구적인 공생적 배열을 통해 새로운 생물 형태가 창조되는 것을 모든 고등동물의 주된 진화 경로로 간주한다. 그는 대표적인 세포기관인 미코톤드리아의 예를 든다. 

 
미토콘트리아는 원래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던 박테리아였고 아득한 과거에 다른 미생물 속으로 침입해 들어가 그 속에서 항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경우는 공생이 항구적인 결연형태로 성사된 것이다. 공생적 결연은 새로운 형태를 낳는다.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김하경의 작품의 상수가 되다시피 한 돌기구조들은 같음(또는 연속성)만큼이나 다름(비연속성)을 인식하게 한다. 특히 다름 속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진화적 창조성의 새로운 경로로서의 공생(symbiosis)의 창발’(마굴리스)이라는 사고는 문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전대미문의 새로움을 위한 경쟁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사고를 교정한다. 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독창성이란 자가당착적인 개념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의 생물학, 가령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개진된 가설 역시 개체는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개체는 다음 세대의 개체에게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도구일 뿐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이다. 유전자가 주인공인 세상에서는 삶과 죽음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김하경의 작품에서 나는 그 경계를 풀어헤치고 타자가 될 수 있는데, 이 타자에는 타인 뿐 아니라 동식물이나 사물까지 광범위하다. 작가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했던 계기는 학창시절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그 허무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할머니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김하경의 작품은 단순한 심미적 표현을 넘어서 주술적이거나 종교적인 역할까지 수행한다. 예술이 이러한 총체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술 활동에 요구되는 가혹한 희생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술은 융모세포처럼 많은 접면을 가진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자신이 마주한 것에서 최대치의 것을 흡수하여 스스로 성장하게 한다.